수도 | 도하(Doha)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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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 180만명 (외국인 86% 포함) | |
면적 | 11,521㎢ (경기도 크기) | |
민족 | 아랍계 40%, 인도계 18%, 파키스탄계 18%, 이란계10%, 기타 14% | |
언어 | 아랍어(영어도 통용) | |
종교 | 이슬람교 (대부분이 수니파) | |
독립 | 1971년 9월 3일(영국으로부터 독립) |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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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여명기에 카타르 지역은 문디르 왕조의 지배하에 있었고 이슬람교는 7세기에 전파되기 시작했다.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사도 무함마드는 포교의 목적으로 군사와 그의 특사 알-알라 알-함드라미를 당시 바레인 및 남부 카타르의 통치자에게 보낸 바 있다. 이를 계기로 알 문디르는 628년 무함마드의 예언을 받아들였고 카타르 지역은 이슬람화 되었다.
중세의 카타르는 페르시아-걸프 지역 정세에 종속되어 있었다. 카타르는 인도로 향하는 무역로의 주요 전략 거점지에 위치해 있었고 포르투갈의 통제 하에 있었으나 곧 오스만 터키의 영향권으로 들어갔다. 이후, 영국은 식민지였던 인도로 향하는 주요 거점지로 카타르 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세기 동안 북부 카타르 지역과 서부 바레인 지역은 바레인 지배 가문인 알-칼리파 가문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다. 1867년에 카타르 지역에서는 알-칼리파 가문에 대항한 반란이 일어났고, 알-칼리파는 군사력을 동원하여 이를 진압했다. 그러나 영국은 외교적인 문제를 제기하며 카타르 지역에 군사력을 동원하였고 바레인으로부터 카타르의 독립을 요구했다. 영국에 압력에 바레인은 결국 카타르의 독립을 인정했으며, 당시 앗-싸니 가문의 셰이크 무함마드 빈 앗-싸니가 카타르를 대표해 협상을 한 바 있다.
제1차 대전 기간까지 중동지역에는 친 오스만 투르크 세력과 친 영국세력 간 권력다툼으로 정세가 혼란했다. 그러나 1916년 제1차 대전에서 오스만 투르크가 패배한 후, 특별조약으로 카타르는 영국의 보호령 하에 편입되었고 이후 카타르의 외교 및 군사권을 대행하였다. 제2차 대전 이후, 영국의 영향력이 약해지면서 걸프지역 국가들은 영국으로부터 벗어나려 했다. 카타르는 1961년 OPEC 정회원으로 가입하고, 1971년에 영국과의 보호협정을 폐지하고 완전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후, 카타르는 아랍연맹 및 유엔에 각각 가입했다.
정치구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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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르의 정치제제는 세습입헌군주제이며, 정부형태는 국왕을 국가원수로 하는 국왕 중심제이다. 국왕은 국가를 대표하고, 모든 법령을 비준하고 공포하며, 각료회의를 주재한다. 또한 국왕은 군 통수권자, 국방장관, 군사령관으로 법률에 따라 각료들과 자문위원을 임명한다.
현재 국왕은 1995년 무혈 궁정 쿠데타로 아버지를 축출하고 왕권을 계승한 알 싸니 가문의 셰이크 하마드 빈 칼리파 알 싸니 (H.H Sheikh Hamad bin Khalifa Al-Thani)이다. 국무총리는 총19명으로 구성된 정부각료회의를 운영한다. 정부의 조직형태는 2007년 이전까지는 복수 부총리제였고, 2007년 이후 단수 부총리제로 개편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의회는 단원제 국회에 해당하는 자문회의와 지방의회에 해당하는 중앙자치의회로 이루어져 있다. 자문의회는 45명의 위원으로 구성되며, 이 중 2/3는 선거로, 나머지는 국왕이 임명한다. 그러나 자문회의의 성격은 서구의 의회의 개념과는 거리가 있다. 국왕은 자문회의에서 제정한 법률안 거부권 및 해산권을 갖고 있다.
중앙자치의회는 전국을 29개 선거구로 분할하여 선출하며, 29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카타르의 법체계는 다른 아랍 국가들과 비슷하게 시민법과 이슬람법에 모두 근거하고 있다. 시민법 체계는 국왕과 정부가 관리하며, 카타르의 헌법은 영구 헌법안으로 이루어져 있다.
현 국왕은 과감한 석유 및 천연가스 전략, 거대한 부의 활용, 국민에 대한 관대한 재분배, 교육 및 의료시설 현대화 등의 치적을 이루어 국민의 지지를 받는 안정된 정권을 유지하고 있다. 또한 카타르는 외교에 역점을 두고 있는데, 기본적으로 카타르의 외교 기조는 GCC 역내 각국과 보편적인 협조체제를 유지하면서 주변 이슬람 국가와도 우호관계를 유지하지만, 친서방 온건 노선을 견지하면서 현실적이며 실질적인 균형 외교를 취하고 있다.
경제구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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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카타르의 경제는 고기잡이와 진주 채취가 주를 이뤘다. 1930년대 일본에서 인공진주를 만드는 기술이 개발되자 카타르 지역의 경제는 큰 위협을 받게 되었다.
석유발견은 카타르 경제사에 큰 획을 긋는 계기가 된다. 카타르의 석유는 1940년대 영국에 의해 발견되었다. 카타르의 석유 매장량은 150억 배럴 수준이며, 천연가스 매장량은 약 26조 세제곱미터에 달한다. 이는 세계에서 가장 세 번째로 많은 양으로 전 세계 매장량의 14%에 달하는 양이다. 카타르의 경제는 다른 GCC 국가와 마찬가지로 석유와 천연가스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편이다.
한편 카타르의 경제는 현 국왕 셰이크 하마드 빈 칼리파가 1995년 궁정 쿠데타로 즉위한 이후 또 한번 전환기를 맞게 된다. 파산 직전의 국가 경제를 살리기 위해 석유와 천연가스에 대한 과감하고 공격적인 수출 전략이 수립되었고 그 결과 천연가스에 대한 경제 의존도는 더욱 심화되었다.
현재 카타르에서 석유와 천연가스의 생산은 국민 생산의 60%를 차지하고 있으며, 국내총생산에서 에너지원의 비율은 60%, 전체 수출의 89%에 달한다. 그 결과 카타르의 에너지원에 대한 의존율은 GCC국가에서도 가장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카타르 정부는 유한한 천연자원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고, 비에너지 부분의 경제 산업을 육성하여 경제 기반 다각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또한 카타르 정부는 새로운 산업 기반 시설의 설치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카타르 금융센터, 교육도시, 카타르 과학 및 기술단지, 에너지 도시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밖에도 카타르 정부는 지식 문화 산업과 같은 미래 산업의 육성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교육 및 과학 기술 부문에서는 카타르의 왕족이 경영하는 카타르 재단이 중심이 되어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해외의 대학과 연구소를 유치해 하나의 소도시를 만드는 교육도시 프로젝트가 있다.
카타르는 세계에서 가장 세율이 적은 국가들 중에 하나이며, 현 국왕의 거대한 부의 활용, 국민에 대한 관대한 재분배, 교육 및 의료시설의 현대화와 같은 치적으로 카타르 국민들은 높은 생활수준을 누리고 있다. 또한 1인당 국민소득은 세계에서 2번째로 높은 수준이다.
사회문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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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르의 인구 중 민족구성은 아랍계 40%, 인도계 18%, 파키스탄계 18%, 이란계 10%, 기타 14%로 이루어져 있다. 국민 대부분 (80%)은 이슬람교를 믿는 무슬림이며, 대부분이 순니파이다. 이들은 사우디아라비아와 비슷하게 모든 일상생활을 이슬람 교리를 바탕으로 한다. 그렇기에 남녀 간의 내외가 강하고 여성의 사회참여가 제한되어 있다. 카타르는 타 종교에 관대한 편이다. 아랍지역에서는 최초로 이주노동자들을 위한 성당이 들어설 정도이다.
카타르 현지인들은 인정이 많고 친화력이 있으며 자존심이나 명예를 매우 중시한다. 복식은 남녀 모두 대부분 아랍 전통 복장을 상용하는 경우가 많다. 비록 이슬람과 아랍 전통의식이 강하지만 발전된 만큼 서구 문물도 많이 도입되면서 남녀 구분과 같은 전통적 요소들도 완화되어 가고 있다.
카타르인들은 대부분 무상 의료와 무상교육의 수혜자이다. 정부는 인재 양성에 힘을 기울이고 있어 학업성적이 좋으면 국비 유학까지 보장하고 있다. 또한 특이한 점은 외국인인 경우라도 이슬람교도이면 무상교육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카타르에는 라디오 카타르 방송국과 카타르 텔레비전, 그리고 알자지라 방송국 등의 방송이 있다. 알자지라 방송은 아랍지역의 방송국들 중 중립적인 논조와 언론활동의 독립성이 비교적 높게 유지되고 있어 세계적으로 주목 받고 있다.
카타르 주요 사건 연대기 |
주요 사건 : ~1999년 | 숨기기 |
1700년대 | 이민자들이 현재의 카타르 해안을 따라 진주채취나 교역 정착촌을 건설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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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7년 | 이웃국 바레인과 영토 문제로 인한 분쟁 발생 (도하는 거의 파괴 됨), 영국이 카타르를 바레인과 분리하여 독립된 실체로 승인한다는 조약에 서명하면서 독립을 위한 움직임이 시작 되었다. |
1871~1913년 | 오스만 제국은 카타르 국왕의 요청에 따라 군대를 주둔 시켰다. |
1916년 | 영국과 보호 협정 체결했다. |
1939년 | 석유가 발견되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으로 발굴이 연기되었다. 이후 석유는 진주채취나 어업을 대신하여 카타르의 주요 수익원이 되었다. |
1950년대 | 석유 수익으로 카타르는 기반시설을 근대화시키고 확장시킬 수 있는 재원을 마련했다. |
1968년 | 영국이 걸프 지역으로부터 군대를 철수한다고 발표함에 따라 카타르는 연방 구성안에 대하여 바레인 및 현재의 아랍 에미리트 연합과 협상했으나 결렬되었다. |
1971년 | 영국으로부터 9월 3일 독립했다. |
1972년 | 칼리파 빈 하마드 앗-싸니가 통치 가문 내부의 파벌싸움 뒤 쿠데타를 통해 권력 을 장악했다. |
1990년 8월 |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한 사건을 계기로 카타르는 외국군 주둔 허용 의사를 밝혔다. 이후 카타르 군대는 쿠웨이트 해방에 참여했다. |
1995년 | 칼리파 국왕은 무혈 쿠데타로 그의 아들 하마드에게 국왕자리를 내어줬다. |
1996년 | 알자지라가 국왕의 자금 지원으로 독립적인 위성방송을 시작했다. 알자지라 TV는 카타르를 중심으로 아랍세계 대부분 국가에 방송되었으며 뉴스보도의 범위를 확장시키고 논란이 있는 문제들을 폭넓게 다뤘다. |
1999년 | 지방자치 선거는 1971년 이후 최초의 민주 선거로 민주화의 시작을 알렸다. |
주요 사건 : 2000년~2010년 | 숨기기 |
2000년 2월 | 국왕의 사촌과 그 외 32명의 지지자들이 1996년의 쿠데타 계획의 실패로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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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3월 | 카타르는 사우디아라비아 및 바레인과 장기간 계속된 국경 분쟁을 해결했다. |
2002년 | 알-우데이드 공군기지가 개발 및 확장되었으며, 워싱턴은 카타르에 미국중부사령부를 배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
2003년 3월-4월 | 카타르 주둔 미국중앙사령부 전진기지는 이라크에서 미국이 주도하는 군사작전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
2003년 4월 | 45명 (30명의 선출직과 15명의 국왕 임명직) 으로 구성된 의회 신설을 규정한 신(新) 헌법이 국민투표로 통과되었다. |
2003년 8월 | 국왕은 왕세자를 자신의 아들 자심에서 더 어린 아들 타밈으로 교체하여 논란을 일으켰다. |
2004년 2월 | 전임 체첸 대통령 젤림칸 얀데르비예브가 거주하던 도하의 집에서 폭탄 공격에 의해 살해되었으며 카타르는 이와 관련해 두 명의 러시아 요원을 종신형에 처했다. 그 결과 러시아와의 관계가 악화되었으며 범인들은 2004년 후반 러시아로 송환 되었다. |
2005년 6월 | 민주개혁을 규정한 카타르 최초의 성문 헌법이 발효되었다. |
2005년 11월 | 카타르와 미국은 세계 최대의 액체 천연 가스 공장을 건설하는 140억 달러 규모의 공동 프로젝트를 착수했다. |
2007년 9월 | 카타르와 두바이는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증권 거래소인 런던 증권 거래소의 최대 주주들이 되었다. |
2008년 3월 | 카타르 최초의 공식 기독교 교회인 성 마리아 로마 가톨릭 교회가 설립 되었다. 이전에는 기독교도들에게 공식적인 예배가 허용되지 않았다. |
2008년 10월 | 카타르는 러시아 및 이란과 함께 가스 수출 국가들의 카르텔인 전문 위원회 를 구성했다. |
2008년 12월 | 사우디아라비아와 카타르는 최종 국경 경계선에 동의하고, 3월 외교 관계 복원 이후 협력 강화를 약속했다. |
2009년 1월 | 카타르는 이스라엘과 무역을 해온 유일한 걸프 국가였으나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를 공격하자 이스라엘과 무역관계를 단절했다. |
2010년 12월 | 카타르는 2022년 FIFA 월드컵 개최국으로 선정되었다. |
주요 사건 : 2011년~ | 숨기기 |
2011년 3월 | 대(對)리비아 국제 군사 작전에 참여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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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4월 | 카타르가 리비아 통치자인 무암마르 가다피 퇴진을 요구하는 국제회의를 리비아에서 개최했으며 카타르가 리비아 반군에게 군사원조를 제공했다고 전해졌다. |
2011년 11월 | 하마드 븐 칼리파 았-싸니는 2013년 카타르 최고의 입법기관인 자문위원히 선거 개최를 공표했다. |
2012년 1월 | 아프간 탈레반은 대화를 촉구하기 위해 카타르에 정치사무소 설립을 표명했다. |
2012년 5월 | 쇼핑몰의 화재로 어린이 13명을 포함한 19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