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 | 아부다비(Abu Dhabi)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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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 826만명(2010), 외국인 88.5% 아부다비 약 197만명, 두바이 약 190만명 | |
면적 | 83,600㎢(한반도의 약1/3) | |
민족 | 아랍인 (16.5%), 외국인(83.5% 인도, 파키스탄인 다수 차지) | |
언어 | 아랍어(영어 통용) | |
종교 | 이슬람교(수니파 84%, 쉬아파 16%) | |
연방창립일 | 1971년 12월 2일 |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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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에미리트에 사람이 살기 시작했던 것은 기원전 5,5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페르시아의 북쪽 문명권과 교류를 했던 것으로 보여 진다. 이러한 관계는 하자르 산에서 생산된 구리 무역으로 이어지면서 기원전 3,000년경 수메르시대에 이 지역은 교역과 상업의 중심지로 성장하게 된다. 이에 힘입어 1세기에는 시리아와 이라크 남부도시들 사이를 잇는 통상이나 성지순례 등 두 가지 목적을 겸하여 캐러밴의 운행이 시작되었다. 이로써 아랍에미리트는 일찍부터 교역의 중심지로서 세계 곳곳에서 들어온 다양한 상품들이 거래되었다.
16세기 초 포르투갈의 항해자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 항로의 발견으로 아랍에미리트는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게 된다. 포르투갈의 지배는 약150년 간 지속되었지만 16세기 초 영국의 도전으로 인해 그 영향력이 감소했다. 17세기에 들어서면서 네덜란드와 영국 해군이 전시 또는 비상사태 하에서 자국이 필요로 하는 해역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적국이 주변 해역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도록 하기위해 인도양의 제해권을 놓고 서로 다투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 바다를 중심으로 생계를 꾸려나가던 주민들은 해상에서의 전통적인 생업에 종사할 수 없어 영국을 비롯한 유럽 선박들을 공격했다. 걸프만에서 유럽 국가들에 대한 공격은 17세기부터 19세기에 걸쳐 매우 왕성하게 전개되었다. 유럽 국가들의 오늘날 아랍의 공격을 해적 행위로 간주하여 오늘날 아랍에미리트 해안 지대를 ‘해적 해안’이라고 불렀다.
1920년 영국과 걸프만 아랍 부족국가들 간에 평화협정이 이루어졌으나 이행되지 않자 영국은 해상휴전협정을 체결했고, 이로 인해 각 토후국들은 영국의 실질적인 보호령 통치를 받게 되었다. 1965년에 아랍 연맹에 아랍에미리트 문제 상임위원회가 설치되었다. 1968년 영국 정부는 1971년까지 모든 영국군 철수성명을 발표하고 1971년 12월 2일 라스 알 카이마를 제외한 아부다비, 아즈만, 푸자이라, 샤르자, 두바이, 움무 알 쿠와인 등 6개 회원국으로 구성된 아랍에미리트가 탄생했다. 1972년 2월 라스 알 카이마가 연방국의 일원이 되면서 오늘날 아랍에미리트는 7개의 토후국으로 구성된 아랍에미리트 연방국이 되었다.
정치구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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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이크 칼리파 빈 자이드 나흐얀 대통령
아랍에미리트는 7개의 에미리트 (아부다비, 아즈만, 푸자이라, 샤르자, 두바이, 라스 알카이마, 움무 알 쿠와인)가 모인 연방국가이며 각 에미리트는 독자적 관할 구역과 역내 관할권을 행사한다. 아랍에미리트 정부는 사법, 입법, 행정부로 구성되어 있다. 행정부는 대통령, 부통령, 수상, 연방최고회의, 내각 등을 포함하며, 연방최고회의는 7개의 에미리트의 통치자로 구성되어 있다. 연방 정부에는 대통령과 부통령이 있으며 임기는 각각 5년이다. 7개의 에미리트의 통치자로 구성된 최고 회의에서 이들을 선출하고 대통령은 수상과 내각을 임명한다. 현 대통령은 아부다비의 통치자인 셰이크 칼리파 빈 자이드 알 나흐얀이며, 부통령 겸 수상은 두바이의 통치자 셰이크 무함마드 빈 라쉬드 알 막크툼이다. 아부다비와 두바이가 아랍에미리트의 핵심 권력을 구성하고 있다.
1971년 임시 헌법 채택 이후 모든 에미리트는 형식상 평등하다는 것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아부다비를 제외한 다른 토후국들은 1996년 5월 연방 최고회의에서 임시헌법을 정식 헌법으로 채택했다. 이후 아부다비를 연방수도를 공식 확정하고 토후국들 간 권력 안배가 안정화 되어가는 추세이다. 아랍에미리트는 독립 이후에도 계속 친 영국 또는 친 서방 외교노선을 고수하고 있으며 걸프협력기구(GCC)와의 협력 체제를 강화하고 지역안보를 위해 협력하고 있다.
경제구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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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에미리트는 사회경제적 지표들을 봤을 때 가장 발전된 국가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1998년 World Bank의 조사에 따르면, UAE의 1인당 GNP는 15,720달러를 기록, 2008년에는 42,934달러로 크게 증가하였다. 1990년대 이후 미국의 국내 원유 생산량 감소와 BRICs의 경제성장, 걸프지역의 불안정 등으로 인한 고유가 시대의 도래로 아랍에미리트 경제에 막대한 오일 달러가 유입되었고, 이로 인해 아랍에미리트의 경제는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
아랍에미리트는 전형적인 아랍 산유국으로서 경제가 원유의 생산 및 수출에 상당부분 의존하고 있다. 아랍에미리트의 원유매장량은 978억 배럴 (세계5위, 점유율8.1%), 가스매장량은 213조 입방피트(세계 5위, 점유율3.4%)에 달하고 있다. 아부다비는 UAE 원유 매장량의 90%이상을 보유하고 있으며 아랍에미리트 전체 GDP의 약 56%를 차지하고 있다. 두바이는 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따라서 두바이는 석유에 의존하지 않고도 경제성장을 이뤄내기 위한 대안으로 중동의 비즈니스 허브로서의 성장 전략을 추진해 왔다. 또한 두바이는 관광산업에 노력을 기울여 부르즈 칼리파, 부르즈 알 아랍, 팜 주메이라 등으로 세계인들의 이목을 끌고 있다. 현재 아부다비 역시 지나친 자원 의존형 경제 구조에서 벗어나기 위해 원전 건설, 철도 건설, 항만 확충 등 대규모 인프라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2008년 미국의 금융위기의 여파로 두바이는 큰 위기를 맞이했으나 아부다비의 원조로 사태는 일단락 되었다.
사회문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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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에미리트의 총 인구 중 외국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75%로 매우 높은 편이다. 취업인구의 90% 정도가 인도, 파키스탄, 이집트, 오만, 이란 등 다른 국가에서 온 이주민이다. 이들은 주로 하층계급에 속하고 있는데, 아랍에미리트는 점차적으로 외국인 고용비율을 줄여나가는 정책을 실시하고 있다. 아랍에미리트의 문화는 전통적 아랍, 이슬람, 베두인 문화가 혼합되어 있으며 인구구성이 다양한 것이 특징이다. 이슬람과 아랍문화의 영향은 건축물, 음악, 의복, 요리법, 생활 방식 등에서 나타나고 있다. 아랍에미리트는 이슬람이 주된 종교이자 생활양식인 다른 지역들과 비교했을 때 비교적 자유롭고 관용적인 사회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아랍에미리트(UAE) 주요 사건 연대기 |
주요 사건 : ~1999년 | 숨기기 |
1820년 | 영국과 지역 지배세력(Local rulers)들이 걸프 해안지역 해적 방어를 위한 조약 체결 이후, 이 지역은 트루셜(Trucial)해안으로 알려지게 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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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2년 | 트루셜 연안 국가들과 영국 간의 협정을 통해 각 토후국들은 내부 권력을 갖게 되었다. 동시에 영국은 이들 국가의 외교권을 갖게 되다. |
1948년 | 셰이크 사크르 빈 무함마드 알 까시미(Saqr Bin-Muhammad al-Qasimi)가 라스 알 카이마(Ras al-Khaymah)의 최고통치자 자리에 오르다. |
1950년대 | 원유 발견 |
1952년 | 7개의 토후국이 트루셜 위원회(Trucial Council) 구성 |
1962년 | 아부다비로부터 최초 원유 수출 |
1966년 8월 | 셰이크 자이드 빈 술탄 알 누하얀(Zayed Bin-Sultan Al Nuhayyan)이 아부다비 최고 통치자 자리에 오르다. |
1968년 | 각 토후국들이 자주적 성향을 갖게 시작하는 이 시기, 바레인과 카타르 트루셜 위원회에 합류했다. 그러나 의견 불일치로 인해 1971년 연합회가 해산되다. |
1971년 11월 | 이란이 아부무사(Abu Musa) 섬과 큰 툰브(Greater Tunb) 섬 및 작은 툰브(Lesser Tunb) 섬 등 3개 도서를 점령하다. |
1971년 12월 | 영국으로부터 독립 후, 셰이크 자이드 빈 술탄 알 누하이얀(Sheikh Zayed Bin-Sultan Al Nuhayyan)이 주재 하에 아부다비, 아즈만(Ajman), 두바이(Dubai), 푸자이라(Fujayrah), 샤르자(Sharjah), 움 알 카와인(Umm al-Qaywayn) 등 6개 토후국이 아랍에미리트연합(UAE)을 결성하다. |
1971년 | 아랍 연맹(Arab League) 가입 |
1972년 | UAE에 라스 알 카이마 합류 |
1972년 1월 | 셰이크 술탄 빈 무함마드 알 카시미(Sheikh Sultan Bin-Muhammad al-Qasimi)가 샤르자의 통치자가 되다. |
1972년 2월 | UAE, 정원40명의 연방의회(FNC) 결성. |
1974년 9월 | 셰이크 하마드 빈 무함마드 빈 하마드 알 샤르키(Sheikh Hamad Bin-Muhammad Bin-Hamad al-Sharqi)가 푸자이라의 최고 통치자가 되다. |
1981년 2월 | 셰이크 라시드 빈 아흐마드 알 무알라(Sheikh Rashid Bin-Ahmad al-Mualla)가 알 카와인의 통치자자리에 오르다. |
1981년 5월 | UAE, 걸프 연합(GCC) 결성에 창립멤버로 참여. 아부다비서 GCC의 첫 정상회담이 개최되다. |
1981년 9월 | 셰이크 후마이드 빈 라시드 알 누야미(Sheikh Humayd Bin-Rashid al-Nuaymi) 아즈만의 통치자 자리에 오르다. |
1984년 10월 | UAE 대통령으로 셰이크 자이드 빈 술탄 알 누하이얀이 네 번째 재임되다. |
1987년 6월 | 샤르자에서 쿠데타 시도 발생. 셰이크 술탄 빈 무함마드 알 카시미(Sheikh Sultan Bin-Muhammad al-Qasimi)는 금융정책 실패를 인정하고 사임하다. 그러나 UAE 통치자 최고의회는 알 카시미를 복직시키다. |
1990년 10월 | 셰이크 빈 사이드 알 막툼(Sheikh Rashid Bin-Said Al Maktum) 사망. 그의 아들 셰이크 막툼 빈 라시드 알 막툼(Sheikh Maktum Bin-Rashid Al Maktum)이 두바이의 에미르 및 UAE 부통령에 취임하다. |
1991년 | UAE, 이라크 쿠웨이트 침공에 대항하여 연합국에 참여하다. |
1991년 7월 | 아부다비 집권가문이 77.4%의 지분을 소유한 국제 신용 상업 은행(BCCI)이 붕괴되다. |
1992년 | 아부 무사섬과 큰 툰브 섬, 작은 툰브 섬 등 3개 도서를 방문하기 위해 이란 비자가 있어야 한다는 이란의 발언에 영유권 분쟁이 심화되다. |
1993년 12월 | 국제 신용 상업 은행 (BCCI) 붕괴로 손실을 입은 아부다비가 BCCI의 경영진을 고소하다. |
1994년 6월 | 사기혐의로 고소당한 12명의 국제 신용 상업 은행 (BCCI)의 경영진 중 11명에게 징역형과 손해배상이 선고되다. |
1996년 | 이란의 아부무사 섬 공항 건설과 큰 툰브(Greater Tunb)섬 발전소 구축으로 영토 분쟁이 강화되다. |
1996년 6월 | 두 명의 국제 신용 상업 은행 (BCCI)경영진이 이의 제기를 통해 사기 혐의를 벗다. |
1998년 | 걸프전으로 인해 단절되었던 이라크와의 외교관계 정상화. |
1999년 11월 | GCC가 아부무사 섬과 큰 툰브 섬, 작은 툰브 섬 등 3개 도서와 관련한 UAE-이란 영토 분쟁에서 UAE를 지지하다. |
주요 사건 : 2000년~2010년 | 숨기기 |
2001년 6월 | 셰이크 자이드(Sheikh Zayed) UAE 대통령, 제소자 6,000명 사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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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11월 | 정부, 테러자금으로 의심되는 62개 기관 및 개인의 자산 동결하다. |
2004년 | 셰이크 자이드 빈 술단 알 나흐얀(Sheikh Zayed Bin-Sultan Al Nahyan) UAE대통령 사망. 그의 아들 셰이크 칼리파(Sheikh Khalifa) 집권하다. |
2005년 12월 | 셰이크 칼리파(Sheikh Khalifa) 대통령이 연방의회(FNC)정원의 절반을 제한 선거를 통해 선출하겠다는 내용의 최초 선거 계획을 발표하다. |
2006년 1월 | 두바이 통치자이자 UAE 부통령인 셰이크 막툼 빈 라시드 알 막툼(Sheikh Maktoum bin Rashid al-Maktoum) 호주를 방문하던 중 사망하다. 이어 동생 셰이크 무함마드 빈 라시드 알 막툼(Sheikh Mohammed bin Rashid al-Maktoum)이 집권하다. |
2006년 3월 | 국영의 두바이 포트 월드(Dubai Port World)社가 미국의 정치적 공격으로 인해 미국 내 6개 주요 항구 경영권을 포기하다. 이 조치는 UAE가 9/11사태의 두 테러리스트의 고향인 점을 들어 테러 위험의 증가를 염려한 것이라고 관계자들은 전했다. |
2006년 3월-6월 | 서구 국가와 같이 공식적 주말의 제정, 외국인 노동자의 의존도를 줄이기 위한 법률 도입, 노동 조합 설립을 허가 등 경제적인 변화 도모하다. |
2006년 12월16일 | UAE 최초 선거 실시하다. 선출된 적은 수의 선거인단이 연방의회(FNC) 정원의 절반을 선출하다. |
2007년 4월 | 선진국으로의 부상을 목표로 국가 개발 전략 발표. |
2007년 9월 | 두바이와 카타르가 세계 세 번째 규모를 자랑하는 런던 주식 거래소의 대주주가 되다. |
2008년 1월 | 프랑스와 UAE가 프랑스의 영구적 군사 기지를 아부다비에 구축한다는 내용의 협정을 체결하다. |
2008년 7월 | UAE가 70억 달러 규모에 달하는 이라크의 부채를 탕감해주다. |
2009년 2월 | 두바이가 유동성 문제 해결을 위해 100억 달러 규모의 채권을 발행하다. |
2009년 3월 | 체첸 라마잔 카디로브(Ramzan Kadyrov)대통령 상대진영의 술림 야마다이브(Sulim Yamadayev)가 두바이에서 암살 당하다. |
2009년 5월 | UAE, 걸프 경제 통합을 위한 화폐 단일화 계획에 불참 선언하다. |
2009년 11-12월 | 국영 투자사 두바이 월드(Dubai World)社가 채무 지불 유예 모라토리엄 선언하다. 이는 수십억 달러의 국외 채무로 채무불이행(디폴트)사태에 이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아부다비는 두바이에게 100억 달러의 지원금을 제공하였고 4억 1,000만 달러가 두바이 월드 긴급구제에 사용되었다. |
2010년 1월 |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인 두바이의 부르즈 칼리파 타워가 문을 열다. |
2010년 | 팔레스타인 급진주의 지도자 무함마드 알 마부(Mahmoud al-Mabhouh)가 두바이 한 호텔에서 살해되다. 이스라엘이 그 배후로 많은 비난을 받다. |
주요 사건 : 2011년~ | 숨기기 |
2011년 3월 | UAE, 리비아 다국적군 군사작전에 참여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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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4월 | 개혁을 요구하는 온라인 청원에 서명한 5명의 활동가들이 수감되다. 이후 11월, 이들은 사면 석방되다. |
2012년 4월 | UAE가 영유권 갈등으로 이란 주재 자국 대사를 소환하다. 이는 이란 대통령이 영토 분쟁 지역인 아부무사 섬을 방문한 일에서 비롯되었다. 라스 알 카이마의 통치 가문 출신의 한 사람이 정치적 개방을 요구했다는 이유로 가택 연금되다. |
2012년 7월 | UAE가 이란의 거듭 반복되는 호르무즈 해협 봉쇄 위협을 무력화하기 위해 육상 송유관을 개통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