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 | 리야드(Riyadh)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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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 2,837만명(2011), 시민권자: 1,940만명, 외국인: 897만명 | |
면적 | 215만㎢(한반도의 10배) | |
언어 | 아랍어(영어 통용) | |
종교 | 이슬람교(수니파 90%, 쉬아파 10%) | |
독립 | 1927년(영국이 독립 국가 승인), 1932년 사우디아라비아 왕국 창설 |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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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비아 반도의 역사와 문화는 고대부터 현재까지 다양한 내부 세력과 외부 세력의 역동적인 긴장 관계를 통해서 변화 발전되었다.
고대 아라비아 반도는 페르시아, 로마, 힘야르, 악숨, 라흠, 가산, 킨다 왕국 등 내부와 외부 세력들의 끊임없는 각축장이 있었다. 종교적으로는 유대교, 기독교, 조로아스터교, 마니교, 마즈닥교 등 다양한 종교 세력들이 경합하면서 공존하는 곳이기도 하였다.
이슬람 세력이 지배권을 장악한 중세기에도 아라비아 반도의 지배권을 차지하려는 압바스 조, 파티마조, 셀주크 왕조, 아이유브조, 맘루크조 등 여러 세력들 사이에서 패권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1517년부터 1차 세계 대전이 끝나는 20세기 초까지, 오스만 제국이 아라비아 반도의 패권을 장악하면서 아라비아 반도 정치에 깊숙이 관여하였다. 1차 세계 대전에서 영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과 아랍 반란군이 협력하여 아라비아 반도에서 오스만 제국을 축출한 이후부터 현재까지 아라비아반도는 영국과 미국의 지배적인 영향력 아래에 놓여 있다.
사우디 왕국은 18세기 중반에 무함마드 이븐 압둘 화합이 이슬람교 개혁과 이를 기반으로 한 국가 창설 운동을 주창하면서 시작되었다. 국가 건설이라는 공통의 관심사를 가지고 있던 무함마드 이븐 압둘 와합과 무함마드 이븐 사우드는 중앙아라비아에 위치한 나즈드 지역을 중심으로 국가 건설과 영토 확장에 강력한 이념적인 동력을 제공하는 종교와 정치 동맹을 결성하였고, 이 동맹은 오늘날 사우디아라비아 왕국 건설의 토대가 되었다.
무함마드 이븐 압둘 와합의 이슬람 해석은 아라비아 반도에 널리 퍼져있던 수피들과 시아파 등 다른 무슬림들을 우상숭배자 혹은 다신교도라고 주장하는 근거를 제공하였다. 동시에 오스만 제국의 통치 영역을 공격하여 사우디 왕가의 지배영역 확장을 위한 공세적인 정책을 강화시키면서, 사우디 왕국 건설을 위한 강력한 민족주의 이념으로 적극 활용되었다.
1차 세계대전이 진행되면서 사우드 왕가는 1915년 12월 영국과 앵글로-나즈드협정을 체결하고 영국 보호령(1915-1927)의 지위를 수락하였다. 영국과 동맹한 사우드 왕가는 영국으로부터 무기와 군사원조 등을 받아서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전쟁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였다. 1차 세계대전 종결 이후, 1925년에 사우디 왕가는1천년 가까이 메카와 메디나(히자즈) 지역을 통치하던 하심가를 몰아내는 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이슬람교의 가장 중요한 두 성지를 장악하였다. 1927년 5월 20일 제다 협정에서, 영국은 히자즈와 나즈드 두 지역을 통치하는 사우디 왕국의 통치권을 승인하였고, 1932년 이 두 지역은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이라는 이름으로 통합되었다.
정치구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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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아라비아는 사우드 왕가가 지배하는 절대군주제 국가이다. 왕족의 핵심구성원들이 왕을 선출하며 울라마라고 불리는 이슬람교 지도층의 동의를 받는다. 왕은 이슬람법에 따라 국가를 통치하며 왕의 제반 결정사항들은 왕족, 울라마, 주요부족의 지도자들, 군, 관료집단 등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 왕은 정책을 결정하고 관료집단을 이끌어나갈 내각을 임명한다.
사법제도는 이슬람법 샤리아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왕은 국가 최고의 상소법원 역할을 한다.
정부의 사회복지제도는 모든 근로자들을 대상으로 하며 실직, 산업재해, 질병, 출산, 신체장애, 노령 등의 경우에 보조금을 지급한다. 또 모든 국민과 외국인 거주자들에게 무료로 의료혜택을 주고 있으나, 보건 및 공중위생 상태는 일반적으로 열악한 편이다. 보건상의 제반 문제들은 의료 요원의 부족으로 더욱 나빠지고 있다.
교육은 모든 학생들에게 무상으로 실시된다. 일부 소수 학생들은 외국 유학을 위한 장학금을 받는데 국내로 돌아와 일해야 할 암묵적 의무가 부과된다. 신문사는 민간인 소유지만 정치적으로 보수적 성향을 띠고 있어 정부에 대한 비판은 거의 하지 않는다.
경제구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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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아라비아는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이 함께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혼합경제체제의 개발도상국이다. 석유의 생산 및 수출이 경제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1970년부터 실시된 5개년 계획으로 본격적인 개발이 시작되었으며, 1인당 GNP는 여러 선진국들과 비슷한 수준이다. 농업생산은 제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농업은 GNP의 5%만을 차지한다. 1980년대에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는 농민들을 위해 농촌지역의 경제기반을 개선할 자금을 조성해 여러 가지 품목들을 자급자족할 수 있도록 만들었지만 아직도 식품 공급의 약 70%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석유수출기구(OPEC)의 최대 산유국으로서 석유생산량이 세계에서 3번째로 크며 세계 총 생산량의 약 1/12을 생산한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초에 걸쳐 정부는 사우디아라비아 석유 생산 전체를 담당하는 아람코 (Aramco: Arabian American Oil Company)를 점차 인수하여 완전한 소유권을 획득했다. 아람코에서 상당량의 천연 가스가 생산되며 그 밖에 광물들도 개발 중이다.
공업 부문은 석유를 포함해서 GNP의 약 1/4를 차지하며 총 노동력의 약 1/10을 고용한다. 서비스업은 GNP의 약 2/5를 담당하고 있지만 고용 인구는 총 노동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전기는 국영 전력회사에서 운영하는 4개의 지방 배전망에 의해 공급되며 전적으로 석유에 의해 발전된다.
사우디아라비아 화폐국이 통화와 막대한 해외자산을 관리하며, 일반은행의 절반 이상이 사우디아라비아가 주축을 이후는 과감한 합작투자를 하고 있다.
사회문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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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아라비아는 아라비아반도의 4/5를 차지하는 이슬람교를 국교로 하는 절대 군주국이다.
사우디아라비아 왕국 내에 이슬람교의 성지 메카와 메디나가 있으며 계율이 엄격한 와하비파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나라이다. 성지 메카는 예언자 무함마드가 태어난 곳이며 거리 중앙에 솟은 성스러운 모스크와 카바 신전은 지극히 성스러운 곳으로 이슬람 신앙 최고의 성역이다. 평생 단 한 번의 순례를 위해 전 세계에서 수 많은 신도가 사우디아라비아로 모여든다.
모든 축제나 휴일은 이슬람교와 관계된 것들이며 그 중 가장 큰 것은 한 달간 해 뜬 후부터 해질 때까지 단식을 행하는 라마단이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문화는 엄격한 와하비 이슬람 율법의 지배를 받고 있어 다소 폐쇄적이다. 시, 정형적인 산문, 웅변 등이 이슬람 시대 이전부터 지금까지 최고의 예술로 여겨지고 있으며 많은 시인과 순회 이야기꾼이 존재한다. 유목민들과 문맹인 부락민들이 여전히 민속문학의 본류를 잇고 있으나, 오늘날에는 신문과 정기 간행물에 문학작품들이 실리기도 한다. 엄격한 와하비 율법에 의해 대중 앞에서의 공연은 금지되어 있지만, 음악과 춤은 항상 사우디아라비아 인들의 일상생활 속에 일부분으로 자리잡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주요 사건 연대기 |
주요 사건 : ~1999년 | 숨기기 |
1871년 | 오스만 제국이 하사 지역을 장악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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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1년 | 사우디 가문이 라시드 가문에 의해서 쿠웨이트로 추방되다. |
1902년 | 압둘 아지즈 이븐사우드가 리야드를 장악하고 사우드 가문이 나즈드로 돌아오다. |
1912년 | 와하비즘을 기반으로 이크완(형제단)이 창립되다. 이크완은 빠르게 성장하여 압둘 아지즈의 중요한 후원자다 되다. |
1913년 | 압둘 아지즈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하사를 빼앗다. |
1921년 | 압둘 아지즈가 나즈드 술탄의 직위를 얻다. |
1924년-25년 | 압둘 아지즈는 하심가의 히자즈 왕국을 무너뜨리고, 이슬람 성지 메카와 메디나를 장악하다. |
1926년 | 압둘 아지즈가 메카의 그랜드 모스크에서 히자즈 왕임을 선언하다. |
1928년-30년 | 이크완이 압둘 아지즈의 근대화 정책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키고, 압둘 아지즈가 이 반란을 제압하다. |
1932년 9월 | 나즈드와 히자즈 지역이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으로 통합되고, 압둘 아지즈가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으로 선포되다. |
1933년 | 압둘 아지즈왕의 장남 사우드가 왕세자가 되다. |
1938년 | 석유가 발견되고, 미국 아람코가 석유 생산을 시작하다. |
1953년 11월 | 압둘 아지즈가 사망하고 왕세자 사우드가 왕에 등극하다. 새로운 왕의 형제 파이잘이 왕세자가 되다. |
1960년 | 사우디아라비아가 OPEC의 창립 회원이 되다. |
1964년 11월 | 사우드가 그의 형제 파이잘에게 폐위당하다. |
1970년 | OIC(이슬람 회의 기구)가 제다에서 창설되다. |
1972년 | 사우디아라비아가 사우디 석유에 대한 미국의 지배권을 감축하면서, 아람코 지분의 20퍼센트를 획득하다. |
1973년 | 사우디아라비아가 10월에 발발한 이스라엘/이집트와 시리아 전쟁에서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서방 국가들에 대한 석유 불매 운동을 주도하다. 석유 가격이 4배가 되었다. |
1975년 3월 | 파이잘 왕이 조카에 의해서 암살당하고, 그의 형제 칼리드가 왕위를 계승하다. |
1979년 | 이집트가 이스라엘과 평화 관계를 수립한 이후, 사우디아라비아는 이집트와 외교 관계를 끊다. |
1979년 | 극단주의자들이 메카의 그랜드 모스크를 장악하다. 정부가 10일 후에 다시 그랜드 모스크를 장악하고, 체포된 사람들은 처형되다. |
1980년 | 사우디아라비아가 아람코에 대한 완전한 지배권을 미국으로부터 가져오다. |
1981년 5월 | 사우디아라비아가 GCC(결프 협력기구)의 창립 회원이 되다. |
1982년 6월 | 칼리드 왕이 심장 마비로 사망하고, 그의 형제이며 왕세자인 파흐드가 왕위를 계승하다. |
1986년 11월 | 파흐드 왕이 “두개의 성스런 모스크의 수호자”라는 직위를 만들어 갖다. |
1987년 | 사우디아라비아가 1979년 이후 이집트와 단절시켰던 외교 관계를 회복하다. |
1990년 | 사우디아라비아가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을 비난하면서 미국에게 개입을 요청하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외국군대, 쿠웨이트 정부와 쿠웨이트 시민들이 사우디아라비아에 체류할 수 있도록 허락하다. 요르단 정부와 에멘 정부가 이라크를 지지한다는 이유로 요르단과 예멘 시민들을 추방하다. |
1991년 | 사우디아라비아가 이라크를 공습하고 쿠웨이트를 해방시키기 위해서 쿠웨이트로 육군을 파견하다. |
1992년 3월 | 파흐드 왕이 통치자의 책임과 의무를 강조하면서 ‘정부의 기본 제도’를 선포하다. 자문위원회(Majlis al-Shura) 설립을 제안하다. |
1993년 9월 | 파흐드 왕이 사우디아라비아를 13개의 행정 구역으로 분할하는 법령을 선포하다. |
1993년 12월 | 왕이 선발한 60명과 의장으로 구성되는 자문위원회가 창설되다. |
1994년 | 이슬람 반체제 인사 오사마 빈 라덴이 사우디 국적을 박탈당하다. |
1995년 11월 | 파흐드 왕이 뇌졸중에 걸리다. 왕세자 압둘라가 국정을 운영하다. |
1996년 2월 | 파흐드 왕이 국정 운영을 재개하다. |
1996년 6월 | 다흐란 근처 미군 건물에서 폭탄 폭발로 19명이 사망하고 300명 이상이 부상당하다. |
1997년 7월 | 파흐드 왕이 자문위원회 구성원을 60명에서 90명으로 늘리다. |
1999년 10월 | 20명의 사우디 여성이 처음으로 자문위원회 회의에 참석하다. |
주요 사건 : 2000년~2010년 | 숨기기 |
2001년 3월 | 일련의 폭발로 영국인 1명과 미국인 1명이 살해된 이후, 리야드에서 영국 노동자들이 체포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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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9월 11일 | 뉴욕과 워싱턴 공격에 연루된 납치범 19명 중 15명이 사우디 국적자들이다. |
2001년 12월 | 파흐드 왕이 이슬람이 테러리즘을 금지하고 있다고 밝히면서, 테러리즘 박멸을 요구하다. 정부는 여성들에게 신분증을 발행하는 등 전례 없는 조치를 취하다. |
2002년 2월 | 2001년 3월 폭발 이후, 리야드에서 영국 남성이 체포되었고, 사우디 당국자들이 그를 고문해서 강제로 자백하도록 했다. 론 존이라는 그 사람은 자백을 취소하도록 허락받은 후에 석방되다. |
2002년 5월 | 수정된 형사법은 고문을 금지와 법률적으로 설명할 용의자의 권리를 포함한다. 그러나 인권 운동가들은 인권 위반이 계속해서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
2002년 11월 | 사우디 외무 장관은 유엔이 허락한다할지라도, 이라크 공격을 위하여 미국에게 사우디 시설물들을 사용하도록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
2003년 4월 | 미국은 1991년 걸프전이후 계속 된 사우디 주둔 미군을 철수할 것이라고 밝혔다. 양 측은 계속 동맹으로 존재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
2003년 5월 | 미국방장관 콜린 파월의 예정된 방문시간 몇 시간 전에 리야드에 있는 서구인들이 거주하는 주택단지에서 폭발이 발생하여 35명이 사망하다. |
2003년 9월 | 300명 이상의 사우디 지식인들(여성과 남성)이 정치 개혁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청원에 서명하다. |
2003년 10월 | 리야드 중심가에서 진행된 정치 개혁을 요구하는 전례가 없던 집회를 경찰이 해산시키고, 270명 이상을 체포하다. |
2003년 11월 | 리야드 주거 단지에서 알카에다 무장 세력의 소행으로 보이는 자살 폭탄 공격으로 17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당하다. |
2003년 11월 | 왕이 자문위원회에 더욱 폭 넓은 권력을 부여하고 왕의 허락 없이 법률제정을 제안할 수 있게 하다. |
2004년 2월 | 하지 순례 동안 사고로 251명이 사망하다. |
2004년 4월 | 4명의 경찰관과 한 명의 보안 대원이 리야드 근처에서 공격을 당하여 사망하다. 리야드 보안대 본부에서 차량 폭발로 4명이 사망하고 148명이 부상당하다. 알카에다와 연계된 단체가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하다. |
2004년 5월 | 얀부에 위치한 석유화학 단지에서 공격이 발생해 5명의 외국인들이 사망하다. 코바르에 있는 석유회사에서 공격과 인질극으로 22명이 사망하다. |
2004년 6월 | 일주일 동안 리야드에서 3번의 총탄 공격이 발생해서 두 명의 미국인과 BBC 카메라 기자가 사망하다. 같은 주에 미국 기술자가 납치되어 참수되다. |
2004년 12월 | 제다에 있는 미국 영사관이 공격당하다. 5명의 영사관 직원과 4명의 공격자가 사망하다. |
2005년 2월-4월 | 사상 최초의 전국적인 지방자치 선거 실시. 여성들은 투표에 참가하지 않다. |
2005년 8월 1일 | 사우디 왕실 법정이 파흐드 왕의 죽음을 발표하다. 왕세자 압둘라가 왕으로 취임하다. |
2005년 9월 | 5명의 무장 괴한과 세 명의 경찰이 동부 도시 담맘에서 충돌로 사망하다. |
2005년 11월 | 세계 무역 기구가 12년 만에 사우디아라비아의 회원 자격에 대해 긍정적인 신호를 보내다. |
2006년 1월 | 363명의 하지 순례객이 메카에서 돌을 던지는 의식을 하는 동안에 충돌이 발생해 사망하다. 메카에서 호텔이 붕괴해 70명 이상의 순례객이 사망하다. |
2006년 2월 | 사우디 정부가 압까이끄에 위치한 주요한 석유 생산 공장에 대한 자살폭탄 공격 계획을 좌절시켰다고 밝히다. |
2006년 6월 | 알카에다와 연계되었다고 알려진 6명의 남성이 리야드에서 경찰과 총격전으로 사망하다. |
2006년 10월 | 사우디아라비아는 다음 세대 왕자들 사이에서 내부 투쟁을 방지하기 위해서 분명한 원칙으로 왕위 계승을 공식화하려고 한다. |
2006년 12월 | 영국은 사우디아라비아와 알 야마나 무기 거래에 대한 사기사건 조사를 중지하다. |
2007년 2월 | 4명의 프랑스 국적자들이 북서부 유적지 마다인 살레 근처에서 발생한 테러 공격의 혐의를 받아 살해되다. 이곳은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있는 곳이다. |
2007년 4월 | 경찰은 172명의 테러 혐의자들을 체포했으며, 이들 중 일부는 자살특공대 임무로 조종사로 훈련을 받았다고 밝혔다. |
2007년 7월 | 종교 경찰은 용의자 체포를 금지 당했다. 이들은 최근에 수감자가 사망한 이후, 지나치게 열성적인 행동에 대해서 비판을 받아왔다. |
2007년 9월 | 사우디아라비아와 영국이 유러파이터 타이푼 전투기 거래에 합의하다. |
2007년 10월 | 왕의 칙령이 사법 제도에 대한 정비를 명령하다. |
2007년 12월 | 사우디 당국이 하지 순례 동안에 성지를 공격하려고 계획한 혐의가 있는 단체원들을 체포하도록 발표하다. |
2008년 4월 | 영국 고등 법정은 4백30억 파운드의 알 야마마 무기 거래에 대한 부패 조사에서 영국 정부가 불법적으로 행동했다고 판결하다. |
2008년 7월 | 영국 상원은 고등 법정의 결정을 뒤집고, 사우디인들이 안보문제에서 런던과 협력을 철회하겠다고 위협했기 때문에, 정부가 알 야마마 무기 거래에 대한 조사에서 정부가 적법하게 행동했다고 말하다. |
2008년 12월 | 사우디아라비아와 카타르는 최종적인 국경 획정에 합의하다. |
2009년 2월 | 인터폴은 사우디아라비아 내에서 공격을 계획하고 있는 협의가 있다고 판단된 85명의 남성에 대해서 경계경보를 발행하다. 이들 중 2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우디인들이다. |
2009년 4월 | 사우디아라비아는 경찰서 공격, 무장 강도와 납치 들을 계획하고 있다는 혐의가 있는 11명의 알카에다 무장대원들을 체포했다고 밝혔다. |
2009년 6월 |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가 이슬람 세계와 미국의 관계를 증진시키기 위한 중동 순방을 시작하면서 사우디에 도착하다. |
2009년 7월 | 법정이 사우디내의 알카에다 무장대원들을 최초의 명백한 테러리즘으로 판결하다. 관리들은 330명이 재판을 받았고, 그러나 몇 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한 명은 사형에 처해졌다. |
2009년 8월 | 사우디아라비아는 알카에다와 관련된 협의가 있는 44명을 체포했다고 밝혔다. |
2009년 11월 | 예멘 반란군들과 국경에서 충돌이 발생한 후에, 사우디 군대는 북부 예멘의 완충 지대를 만들기 위해서 이동하다. |
2010년 10월 | 미국 관리들이 사우디아라비아에 6백억 불 상당의 무기를 팔 계획을 확인하다-이것은 미국 역사상 최대 수익을 낸 단일의 무기 거래다. |
2010년 11월 | 관리들은 지난 8개월 동안 149명의 무장대원들을 체포했다고 발표했다. 이들 대부분은 이른바 알카에다 소속으로 추정된다. |
2010년 12월 | 웹사이트 위키 리스크가 폭로한 외교 케이블은 사우디아라비아가 전 세계 수니 테러리스트 그룹들을 위한 자금 지원의 ‘가장 중요한’원천이라는 미국의 우려를 제시하다. |
주요 사건 : 2011년~ | 숨기기 |
2011년 2월 | 소요 상태가 아랍 세계 전역에서 계속되기 때문에, 압둘라 왕은 복지 사업 비용을 증대시키기로 발표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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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3월 | 주로 시아파 밀집한 동부 지역에서 소규모 시위가 발발한 이후, 대중 시위가 금지되었다. 압둘라 왕은 국가 안보와 안정을 위협하는 것은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하다. |
2011년 6월 | 사우디 여성들이 여성 운전 금지를 무시하고 상징적으로 항의 운전을 하다. |
2011년 9월 | 압둘라 왕은 여성들이 자치의회 선거에서 투표할 수 있는 권리와 입후보할 수 있는 권리,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 기구인 자문(슈라)위원회에 임명될 수 있는 권리를 포함하는 더 많은 권리를 여성에게 부여한다고 선언하다. |
2011년 10월 | 왕세자 술탄이 사망한 이후, 나에프 빈 압둘 아지즈가 왕위 계승자가 되다. |
2011년 12월 | 미국이 사우디아라비아에 대한 전투기 대규모 판매를 승인하다. |
2012년 4월 | 알카에다와 연루된 혐의로 50명의 남성이 재판을 받다. 2003년 외국인 거주 건물 폭파 협의도 포함된다. |
2012년 6월 | 왕세자 나에프가 사망하고, 더 자유주의적인 국방 장관 76세의 살만이 왕세자가 되다. |
2012년 7월 | 시아 성직자 니므르 니므르와 다른 사람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아파의 시위자들에게 경찰이 총을 발사했다는 보도가 나간 이후, 보안대가 동부 지역 카티프에서 몇 몇 주민들을 구금하다. 이번 달 초에 니므르 니므르의 체포에 저항하는 집회에서 두 명의 주민들이 사망하였다. |
2012년 9월 | 인권 단체 활동가인 무함마드 알 카타니와 압둘라 알 하미드가 재판을 받다. 무함마드 알 카타니는 무허가 단체를 설립한 혐의를 받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