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 | 무스카트(Muscat)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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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 280만명(2011) | |
면적 | 309,500 ㎢ | |
민족 | 아랍인 | |
언어 | 아랍어, 영어 통용 | |
종교 | 이슬람교(이바디파가 다수 차지) | |
국경일 | 11월 18일(국왕 탄생일) |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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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에는 적어도 1만 년 전부터 사람이 살았으며 아랍인들이 오만으로 이주해오기 시작한 것은 BC 9세기부터이다. 그 중에는 남서 아라비아에서 온 카흐탄족과 북서 아라비아에서 온 니자르족 등이 있었는데 두 종족 간의 대립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오만 역사에 영향을 미쳐왔다. 이슬람교로 개종한 7세기까지 오만은 종족간의 전쟁과 페르시아인의 침입에 시달렸다.
이슬람은 630년부터 오만에 전파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8세기 초부터 오만에는 카와리지파로부터 유래한 이바디파(Ibadhis)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749년 오만의 이바디파는 알 줄란다 이븐 마스우드를 이맘으로 선출하고 내륙에 위치한 니즈와(Nizwa)를 수도로 하는 최초의 이맘국을 건설했다. 그 뒤 이맘들의 통치가 이어지다가 1154년 바누 나반이 새로운 왕조를 세웠다.
1428년부터 이맘들은 다시 한 번 세력을 모아 지역 통치자에게 도전했다. 1624년 이맘이 된 나스르 이븐 무르시드는 종족간의 분쟁을 종식시켰다. 1741년 그의 후계자는 16세기 이래 해안 지대를 통치해오던 포르투갈을 몰아내고 오만 해안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했다. 18세기 초 가흐탄족의 후손 히나위족과 니자르족의 후손 가리피족 사이에 내전이 일어났으나, 1744년 두 종족이 공동으로 알 부 사이드 가문의 아흐마드 이븐 사이드를 이맘으로 선출하면서 내전은 종결되었다. 그의 후계자들은 술탄이라는 칭호를 얻었으며 오만과 아프리카 동부에 걸쳐 큰 제국을 건설했다.
1891년 영국과의 조약이 체결되고, 오만은 영국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이는 1951년에 영국과 우호통상조약 체결 때까지 지속되었는데, 이로써 오만은 완전한 독립국이 되었다. 오만의 역사에서 술탄과 이맘의 권력 다툼은 계속되었는데, 이러한 분쟁은 1959년 마지막 이바디 이맘이 오만에서 쫓겨남으로써 종식되었다. 1971년 아랍연맹과 국제연합에 가입했으며, 1981년에는 걸프협력기구(GCC)의 창립회원이 되었다.
정치구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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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은 절대 권력을 지닌 술탄이 자신이 직접 뽑은 내각, 직접 지명한 사람들로 구성된 자문회의(1981-1992), 자문평의회 등을 통해 통치하고 있으며, 헌법이나 선거로 구성된 입법부나 합법적인 정당은 없다. 법체계는 코란과 순나(예언자 무함마드의 언행)을 토대로 한 이슬람법인 샤리아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1996년 공포된 국가 기본법이 있다. 과거에 국가자문의회가 의회의 역할을 했었으나 1992년에 폐지되었다. 그 후 1992년 발족한 자문평의회와 1997년 발족한 국가평의회가 통합되어 오만평의회가 구성되었는데 이것이 의회의 역할을 하고 있다. 2000년 처음으로 자문평의회가 직접선거를 통해 선출되었다.
반정부세력으로는 오만 해방인민전선(PFLO)이 있는데, 이들은 오만 남부에 위치한 도파르 주(州)의 산악지대에서 활동하며 유격전을 벌이고 있다. 1970년까지는 타이무르 국왕의 쇄국정책에 의하여 영국, 미국, 인도 이외의 국가와는 국교가 전혀 없어 국제사회로부터 완전히 고립되었다. 그러나 1970년 카부스 현 국왕이 궁정 쿠데타로 즉위한 후 개방정책을 취하여 적극적으로 외국과의 국교 수립을 추진하고 있다.
오만은 비동맹 중립을 표방하나, 기본적으로는 아랍 국가들 중 가장 친서방 정책을 취하고 있으며, GCC 성립 이후 걸프 국가들과의 관계 및 협력 증진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또한 기본적으로 영국과 미국 등 서방 국가와 안보협력 및 우호적 외교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경제구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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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은 개발도상국으로서 민간부문과 공공부문이 함께 존재하는 혼합경제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경제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석유 생산 및 수출이다. 국민총생산(GNP)은 1980년대에 인구 증가 속도보다 빠른 성장률을 기록했다. 1인당 국민소득은 선진국과 비슷한 수준이다. 노동력의 약 절반이 농업부문에 종사하지만 소득은 GNP의 약 3%밖에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 내수용 농업이 대부분이나 라임과 대추야자는 수출한다.
1964년 정부와 외국자본이 공동 투자한 석유개발회사에서 상업성 있는 유전을 발견했다. 오늘날 석유에서 나오는 수입이 GNP의 절반이 넘으며, 정부 수입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원래는 전통적인 수공업이 주종을 이루었으나 1964년 이후 석유생산에 대한 정부의 투자로 건설업과 제조업의 발전이 촉진되었다. 1980년대 말 정부지출은 석유산업을 통한 세입보다 빨리 증가했고, 그 결과 오만은 다른 나라로부터 차관을 비롯한 재정원조를 받아야 했다.
주요 수출 품목은 원유이지만, 매장량이 적고 품질이 낮다. 다른 GCC 국가의 경우 원유 1배럴을 생산하는데 2달러 정도의 비용이 드는데 반해 오만의 원유는 7달러의 비용이 소요되기 때문에 경제성이 현저히 떨어진다. 또한 현재 오만의 원유 매장량은 앞으로 20년 정도후면 소진 될 것으로 예상된다. 다른 GCC 국가에 비해 매장량이 현저하게 적은데도 불구하고 석유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경제 구조로부터 탈피하여 산업의 다각화를 이룩하는 것이 향후 오만 경제의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다.
이에 따라 오만 정부는 2020년까지 석유에 대한 GDP 의존도를 9%대로 낮추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경제의 자유화, 민영화, 산업화를 적극 추진하고 있다. 오만의 경제 발전은 정부의 5개년 개발계획을 기초로 이루어지는데, 1976년에 시작된 5개년 개발계획은 현재 제 7차 계획으로 진행되고 있다. 한편 1995년에 수립된 <비전 2020게획>은1996년부터 2020년까지 25년의 기간에 오만의 경제, 사회 근대화를 추진하는 것으로서, 경제 및 금융의 안정화, 경제에 대한 정부 역할의 확립과 민간 부문의 참여 확대, 국민소득의 저변 확대, 오만 경제의 글로벌화, 오만 인적자원의 질적 향상과 같은 목표들을 내세우고 있다.
경제의 다각화에 있어서 오만이 가장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은 바로 관광이다. 오만은 아라비아반도의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산, 오아시스, 바다로 구성된 관광자원을 지니고 있다. 특히 오만만과 아라비아해가 내려다보이는 해안에 외국인들을 위하 휴양지 및 은퇴 거주지를 유치하기 위해 오만 정부는 외국인의 부동산 소유를 허가하고 관광과 부동산 개발을 동시에 추진하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GCC와 관련된 오만의 경제 정책 가운데 한 가지 주목할만한 점은 GCC 화폐 통합에 반대의견을 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만은 GCC 화폐 통합 시 요구되는 2010년까지의 의무 사항 준수를 지킬 수 없기 때문에 그 이후에나 가입을 고려할 것이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사회문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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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 인구의 대다수는 아랍인이다. 하지만 과거 식민지였던 파키스탄 지방이나 아프리카 잔지바르 지역 출신자 또는 그 지역 혼혈인이 다수 있으며, 사막에는 소수의 베두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인구의 절대 다수는 무슬림이지만 개방적이어서 타종교의 활동을 허락하고 있다. 이에 따라 주요 도시에는 기독교 교회가 설립되어 있고 이곳에서의 예배도 허용된다. 1970년대에 정부는 보건 수준을 크게 향상시켰으나 아직도 보건환경이 열약해 수많은 사람들이 세균성 이질을 앓고 있으며 유아사망률도 높은 편이다. 이러한 보건상태 때문에 평균수명은 55세로 비교적 낮은 편이다.
오만 주요 사건 연대기 |
주요 사건 : ~1999년 | 숨기기 |
700년대 | 아랍 통치권 수립과 이슬람의 전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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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년대 | 이바디 이슬람 분파가 이맘 통치권 수립하다. |
1507년 | 포르투갈이 무스카트를 포위하고 오만 해안 장악. 1650년 오만에서 포르투갈이 축출되다. |
1800~1900년대 | 오만 제국이 아프리카 동부 해안의 잔지바르와 몸바사 그리고 인도 대륙의 일부를 장악하고 강력한 해양 세력으로 등장하다. |
1737년 | 페르시아가 침공하다. |
1749년 | 페르시아 축출되다. 알 부 사이드 왕조가 권력을 장악하고 오늘날까지 유지되고 있다. |
1913년 | 오만 지역의 통치권이 분열되다. 이바디 이맘이 내륙 지방을 통치한 반면, 술탄이 해안 지역을 통치하다. 1920년 영국이 중재한 협정으로 술탄이 내륙 지방의 자치를 승인하다. |
1954년 이후 | 내륙 지방의 독립을 추구하는 이맘 세력과 술탄 세력 사이에 분쟁이 재개되다. |
1959년 | 술탄 사이드 빈 타이무르가 내륙 지방의 통치권을 다시 장악하다. 그의 통치 체제는 고립주의적인 특징을 띄었다. |
1964년 | 석유 매장지가 발견되다. 1967년에 석유 생산을 시작하다. |
1965년~1975년 | 정부에 대항하는 좌파 세력이 도파르 남부 지역에서 반란을 일으키다. 이 반란은 최종적으로 요르단과 이란이 파견한 군대의 도움으로 진압되다. |
1970년 | 술탄 사이드 빈 타이무르가 아들의 무혈 쿠데타로 전복되다. 이 쿠데타를 통해서 권력을 장악한 술탄 카부스 빈 사이드가 자유화와 근대화 사업을 개시하다. |
1981년 | 오만은 걸프협력기구(GCC) 창설 회원이 되다. |
1997년 | 술탄 카부스가 여성의 슈라 위원회에 대한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부여하다. 두 명의 여성이 슈라 위원으로 선출되다. |
1999년 | 오만과 UAE 사이에 국경 획정 협정이 체결되다. |
주요 사건 : 2000년~2010년 | 숨기기 |
2001년 10월 |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에 대항하는 대규모의 영국·오만 군사 훈련이 오만 사막에서 실시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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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1월 | 술탄 카부스가 21세 이상의 모든 시민들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다. 이전에는 투표권이 부족 지도자, 지식인, 사업가들 중에서 선발된 일부에게만 한정되었다. |
2003년 10월 | 21세 이상의 모든 시민들이 투표권을 행사한 최초의 슈라 위원회 선거가 실시되다. 그러나 슈라 위원회 정치적 구도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 |
2004년 3월 | 최초의 여성 장관 임명. |
2005년 1월 | 이슬람주의자로 의심받는 100여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체포되다. 31명은 정부 전복을 시도한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으나 6월에 사면되다. |
2006년 1월 | 오만과 미국 간에 자유무역 협정이 체결되다. 이 협정은 동년 6월 미국 하원에서 그리고 7월 미국 상원에서 비준되었다. |
2007년 6월 | 강력한 사이클론이 걸프 지역을 휘몰아쳐서 50명 이상이 사망하고 석유 생산 시설이 파괴되다. |
2009년 6월 | 화물선이 오만 해안에서 소말리아 해적으로 의심되는 집단에 의해 납치되다. |
주요 사건 : 2011년~ | 숨기기 |
2011년 2월 | 직업 창출과 정치 개혁을 요구하는 시위가 발발하다. 시위자 한 명이 경찰이 쏜 총에 의해 사망하다. 술탄 카부스가 일자리와 복지 증진을 약속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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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0월 | 슈라 위원회 선거 실시. 아랍의 봄으로 촉발된 불안정성 이후, 술탄 카부스는 슈라 위원회에 더 큰 권력 이양을 약속하다. |
2012년 9월 | 실업문제 해결과 민주화 요구 시위가 지속되는 가운데, 온라인에서 정부를 비판한 활동가들에 대한 재판이 열리다. 6명이 12~18개월의 징역형과 함께 2,500 달러에 상당하는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